열린마당
돌아올 수 없는 다리(판문점)에서… 美 노병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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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석
기자 6·25 참전용사 아든 로울리 "60년전 그날도 오늘처럼 펑펑" 83세의 미국 6·25 참전용사 아든 로울리(Rowley)는 27일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60년 전
33개월
동안
북한군
포로로
지내다
남북
포로교환으로
다리를
건넜던
순간이
떠올라서다.
"1953년 8월 18일이었다. 덥고 습했다.
트럭을
타고
다리를
건너
판문점에
내렸다.
살아서
고향
땅
애리조나를
밟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그날도
오늘처럼
펑펑
울었다." 로울리
예비역 소령은 스무살 때인 1950년 7월 미 제2공병대대
소속으로 일병 계급장을 달고 부산땅을 밟았다. 그해 12월 1일 북상하던 그의 부대는 평양 북쪽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돼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그가 복무했던 제2공병대대는 여전히
한국에 주둔하고 있으며, 매년 11월 30일밤 부대기를 불태우는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들킬까봐 오래 보지도 못하고 엉엉 울면서 먹어치웠다"고 했다. 자유의 다리를 건넌 장병은 3600여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그는 3년 동안 포로로 지냈던 기억을 책으로 엮고 있는데 올해 4번째 책을 냈다. 그는 "나이가 많이 들어 이번이 마지막 한국 방문이 될 것 같다"고 했다가 말을 바꿨다. "남북 통일이 된다면 꼭 다시 와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건너보고 싶다." 조선일보
사회면 전 현석기자
그는 "(포로 생활 중) 부대원들이 북한군
감시를 피해 케이크를 만들어 성조기 장식을 했다"며
그는 "영양실조와 추위, 북한군의 폭력에 수많은 포로들이 죽었다"며 "포로로 잡힌 미군 7140여명 중
그는 딸 하나에 아들 셋, 손주 열여덟 명, 증손주
열일곱 명을 뒀다. 5번째 한국을 찾은 그는 이번에는 손자 밀러 로울리(18)와 함께 왔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골4:6)